[코스인코리아닷컴 전문위원 김기현] 지속가능경영(ESG)보고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CEO 메시지를 보면 대부분 ‘존경하는 이해관계자 여러분!’으로 시작해 대체로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겠다’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예전 같으면 ‘존경하는 주주 여러분!’으로 시작해 ‘주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로 끝맺음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 건 분명하다. ‘이해관계자’라는 단어는 어려운 단어는 아니나 정확한 의미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사전에서 이해관계자(stakeholder)를 찾아보면 ‘이해당사자, 주주’라고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해관계자를 ‘주주’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해당사자’라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함에 따라 그 의미도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어원을 따져 보면 말뚝을 뜻하는 ‘stake’와 ‘잡고 있는 사람’이라는 ‘holder’가 합쳐진 단어다. 예전에는 땅 주인이 쇠말뚝을 박아 내 땅임을 표시했으니 이해관계자(stakeholder)란 결국 주인을 뜻하는 개념이다.
‘존경하는 주주 여러분’에서 ‘존경하는 이해관계자’로의 변화는 회사 경영의 중심이 이제 ‘주주’에서 ‘이해관계자’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회사의 이해관계자는 어디서부터 어디일까? 오늘날 기업의 이해관계자는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이해 당사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기업의 경영 활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 조직, 단체 등이 포함된다.
기업의 활동을 한번 정리해 보자. 기업은 대체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익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해 구성원에게 임금을 지불하며 이익이 생기면 이 중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한다. 그리고 남는 이익은 주주들에게 배당하거나 재투자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이 과정에서 예전에는 기업의 이해당사자를 회사에 자본을 출자한 주주로 한정했다면 이제는 주주, 임직원 등 회사 내부는 물론 고객, 협력업체, 정부, 지역사회, 시민사회까지 기업의 활동에 영향을 주거나 받는 모두를 기업의 이해 당사자로 보게 됐다.
2023년 국제 기독교 자선단체인 월드비전(World Vision)이 발표한 ‘미용의 높은 비용’(The High Price of Beauty)이라는 보고서는 화장품 성분 중 약 30%를 차지하는 광물과 농산물의 공급망을 조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화장품에 많이 사용되는 팜유, 코코아, 바닐라, 시어, 운모, 구리 등 6가지 성분의 재배, 수확, 운반 등에 많은 아동들이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그들은 하루에 2달러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국 월드비전의 마크 쉬어드 대표는 “우리는 화장품의 성분 중 일부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외면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체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 화장품 제조기업들은 제품을 잘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우리가 만든 제품에 혹시라도 해외 어느 곳 아동들의 땀과 눈물이 담겨있는 건 아닌지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업의 경영은 주주 중심이었다. ‘기업의 목적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 아래 대부분의 회사는 매출은 최대로 키우고 비용은 최소로 쥐어짜는 단기 실적 위주의 경영을 펼쳐 왔다. 값싸게 재료를 구입해 사용감 좋게 만들고 예쁘게 포장하고 판매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룰이었다. 약간의 반칙도 허용됐다.
하지만 이제 시대의 룰이 바뀌었다. ESG경영 트렌드와 함께 ESG경영공시, 공급망실사지침, 플라스틱협약, 에코디자인규정, 그린워싱금지법 등 다양한 규제가 생겨나고 있다. 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사항들도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
이해관계자(Stakeholder)는 주주(Shareholder)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주주의 이익이 곧 이해관계자 모두의 이익이 되지는 않았다. 돈만 벌면 된다는 단기 성과주의, 이익 우선주의, 자사 우선주의를 중시하는 기존의 경영방식은 주주들에게는 두둑한 배당 수익을 주었지만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는 인권 문제, 협력업체 갑질, 환경 문제 등 지속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세상이 변하면서 ‘이해관계자 경영’이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기존의 주주 입장에서는 썩 내키지 않는 변화일 수 있다. 예전 같으면 기업이 얻은 이익의 대부분을 주주에게 배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ESG경영을 추진하기 위해 당장은 돈이 될 것 같지 않은 환경 관련 사업에 투자하거나 사회공헌 활동에 자금을 사용한다고 하니 못마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경영’이 기업의 수익을 망칠 것이라는 막연한 우려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된 것 같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최고경영자인 래리 핑크는 2022년 초에 최고경영자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바보(woke)’가 아니라며 이해관계자 경영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소수의 주주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기후변화가 기업의 장기적인 전망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며 이 문제에 대처하지 않는 국가와 기업은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그는 석탄 연료를 사용해 얻은 매출이 25%가 넘는 기업의 채권과 주식을 처분했다.
래리 핑크 회장은 “나는 환경주의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자이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둔다”며 “기업도 이제는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두어 엄청난 경제적 변화에 맞춰 변화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설화수 지속가능보고서 (아모레퍼시픽 홈페이지)
BP PLC는 영국 최대 기업 중 하나로 미국의 엑슨모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회사이다. 또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다국적 에너지 기업이다. BP는 2020년 2월 최근의 기후 변화에 대응해 재생 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Net-Zero 2050 전략을 발표했다.
이 전략에 따라 BP는 석유와 가스 사업을 기존의 1/3 수준으로 대폭 축소하고 저탄소 에너지에 대한 자본 지출을 10배로 늘려 연간 5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아울러 저탄소화를 위해 많은 자금이 투자 비용으로 소요되기 때문에 주주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은 약 50%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BP의 결정에 대해 회사 측과 주주는 상당한 주가 하락을 우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BP의 주가는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7.8% 이상 급등했다. 비록 단기적으론 수익이 줄어들고 주주들의 배당금도 줄어들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회사의 결정이 수익성에도 긍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주가에 반영된 결과였다.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usiness Roundtable)은 미국 내 200대 대기업 협의체로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설립됐다. 이 단체는 시가 총액이 미국 기업 전체의 20%를 차지하며 미국 최대 경영자 단체로 1972년 설립됐다. 전미제조업협회(NAM), 미국 상공회의소(US Chamber of Commerce)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로비 단체로도 꼽힌다. 한마디로 한국의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과 같은 곳이다.
2019년 8월 미국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은 기업의 목표를 주주 최우선이 아닌 이해관계자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것으로 재정의하는 선언을 했다. 이는 놀라운 사건으로 전경련과 유사한 기업들의 이익단체가 주주 중심에서 벗어나 기업의 경영을 주주 뿐 아니라 소비자, 임직원, 협력사, 정부 등 기업과 관계된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2023년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의 평균 수명이 1958년 기준 61년에서 2027년에는 12년 수준으로 대폭 단축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당장의 수익만을 추구하는 단기 실적주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눈앞의 실적만을 추구하다 보면 장기적인 성과 창출을 위한 준비와 의사결정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변화가 절실한 대전환의 시기가 오면 힘 한번 못 쓰고 허물어지게 된다.
2021년 다보스 포럼에서 클라우드 슈밥 회장은 기업의 힘은 단순히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임을 강조했다. 자극적인 음식이 당장은 혀끝을 만족시킬 수 있으나 건강에는 좋지 않다.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한 심심한 음식이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건강에 더 좋은 경우가 많다. 단기 실적이 기업의 건강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머크, 존슨앤존슨, 유한양행 등 장수기업의 공통적인 특징이 대체로 사회에 기여한 착한 기업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얼마 전 집 안을 정리하다 오래된 책 한 권에서 눈에 띄는 문장을 발견했다. 1997년에 발행된 ‘이건희 에세이’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며 글로벌 제약회사 머크의 사례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경제적 가치는 자연스럽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놀랍게도 누군가는 무려 27년 전에도 아니 그 이전에도 이미 ESG를 실천하고 있었다.
“기업이 사회적 요구에 관심을 갖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업의 또 다른 책임이다. 나는 이것을 기업의 ‘보이지 않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나는 제약회사인 머크를 보이지 않는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여긴다. 아마 20년 전이었을 텐데 이 회사의 한 연구원이 자메이카의 소수 인종에만 나타나는 유전병에 관심을 가졌고 연구 끝에 ‘프로스카’라는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를 개발했다. 이 치료제로 머크는 수많은 남성들의 고민을 해결하고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그 치료제 개발로 얻은 이익보다 치료제를 개발하게 된 동기다. 머크는 단순한 기업 이익보다 인류 사회에 공헌한다는 생각에서 치료제를 개발했고 이익은 거기에 뒤따른 것이었다.”
ESG경영의 확산과 함께 우리 기업도 이해관계자 경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8년 포스코는 ‘기업시민’이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선포했다. SK의 최근 지속가능경영(ESG) 보고서에서도 ‘기업시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포스코는 기업시민헌장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ESG 성과 창출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기업시민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데 집중하겠다고 했다.
아직은 오래된 주주 중심의 경영이 완전히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전환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상당 부분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투자자나 소비자들은 ESG경영에 대한 공시와 소통을 더욱 요구할 것이며 글로벌 거래처들은 지속가능경영 활동 준수와 관리에 대한 요구가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 규제나 국제사회 차원의 정책 변화 또한 계속해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존경하는 이해관계자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지속가능경영(ESG)보고서는 기업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며 경영 성과를 공유하는 ESG경영의 결과물이자 소통 채널이다. 최근에는 아모레퍼시픽의 스킨케어 브랜드 ‘설화수’가 브랜드 차원의 지속가능 보고서를 발간했다.
ESG시대의 기업은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상생해야 하는 시민이다. ESG경영공시 대상 기업이 아니더라도 알리고 싶은 것만 골라서 홍보하는 기존의 광고선전 방식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는 게 필요하다.
향후에는 지속가능보고서가 다른 화려한 프로모션들보다 우선되는 뷰티 브랜드들의 필수적인 마케팅 도구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김기현 소셜벤처 슬록(주) 대표이사
화장품 자원순환 플랫폼 '노웨이스트'운영, 업계 최초 화장품 탄소발자국 계산기 개발, 지속가능 화장품 검증서비스 '케이-서스테이너블' 운영, ESG, 탄소중립 관련 칼럼, 세미나 연사 활동, ISO ESG 심사원, * 공저 '광고를 알아야 크게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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